강한 독립 생활의지와 철저한 분가 원칙

                                                    -제주도의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제주도는 자연 경관이나 말씨가 육지와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생활관습과 생활태도도 육지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흔히 제주에서는 여자가 일을 하고 남자가 아기를 본다는 등의 과장된 허풍이 좀 섞인 표현도 하지만 실제로 여자의 역할이 육지부보다 훨씬 더 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의 가족생활은 여러가지 면에서 육지의 전통 가족생활과 차이가 있다.

 -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툴 일이 드믈다.

 제주도의 가족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철저한 분가 원칙에서 찿을 수가 있다. 육지의 전통 가족제도에서는 장남이 혼인하여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를 모시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차남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장남까지도 혼인하면 분가하기 때문에 부모식구와 아들식구가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이 생활하는 경우가 매우 드믈다. 그래서 자식들을 분가하여 놓고 부락안에서 따로 생활하는 노인가족들을 제주 어디에서고 흔히 볼 수가 있다.

 자식이 분가 할 적에는 집을 따로 마련해 줄뿐만 아니라 경작지도 나누어 주어, 가꾸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수확도 따로 하고 셈도 따로 한다. 설령 가정형편상 한 울타리안에서 부모식구와 아들식구가 함께 사는 경우에도 따로 농사하고, 의식주를 따로 해결한다. 예를 들어 돈을 빌린다면 부모자식간에도 채권채무관계가 형성된다. 한 울타리안에서 부모식구와 아들식구가 따로 살림을 한다는 것은 육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는 철저한 분가원칙의 일부분일 뿐이다. 제주에서도 혼인한 아들과 부모가 한 살림을 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 아들을 혼인시키고 미처 분가시켜 주지 못하여 잠시 함께 살거나 부모가 나이가 들어 독립생활을 할 능력이 없을 때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외적인 관례다.

 이처럼 강한 독립 생활의지와 철저한 분가원칙 때문에 혼인한 자식과 부모가 함께 사는 직계가족은 드믈며, 대부분의 부부와 그 미혼의 자녀로 구성되는 핵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그래서 제주에는 늙은 부부로 형성된 가정이나 여자 혼자인 가정이 아주 흔하다.

 이렇게 살림살이가 서로 갈라져서 부부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육지의 전통가족제도에서 흔히 보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나 시누이와 올케 사이의 갈등이 제주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다. 부부중심의 생활은 자연히 시어머니의 통제력이나 시누이의 시샘을 약화시킨다. 제주 아낙들이 시집의 뜻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친정을 드나드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부부중심의 가족생활은 한편으로는 부인의 자율성과 역할참여의 증대를 가져온다. 즉 집안의 중대사의 결정도 부부가 의논하여 결정하는 비율이 높다. 오히려 밭농사 중심의 농업의 특수성 때문에 여자의 일이 많고, 잠수일 등을 통한 수입등으로 일반적인 가정수입에 대한 기여도는 여자가 높은 편이었다.

- 분가의 형태

 제주 사람들은 강한 독립생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철저한 분가주의를 원칙으로 삼고 있어서 분가의 형태와 재산상속에서도 육지와 매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분가의 일반형태는 자식이 부모의 집으로부터, 부모가 살아 있지 않을 경우에는 맏형의 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된 생활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 제주에서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독립해 나가는 경우와 부모가 살던 집을 자식이 물려받는 경우가 있다. 뒤의 경우는 제주에서만 볼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주에서는 전통적으로 많이 취해온 분가방식이다.

 이러한 분가방식은 장남을 독립시키는 경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들을 독립시키는 경우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여러번에 걸쳐서 부모가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전통방식은 아니지만 육지에서와 같이 부모가 살던 집에 미혼 자녀를 거느리고 그대로 살고 자식이 이사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최근에는 장남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나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 제주에서 흥미로운 것은 혼인하는 시기와 분가하는 철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후가 온화하여 한해 동안 늘 일손이 바쁜 영농조건 때문인지 몰라도 혼사와 분가가 거의 가을걷이가 끝나고 하곡파종이 끝난 겨울철에 치러진다. 대체로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이 기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신구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사나 집수리 같은 일은 이 기간에 해야만 ‘동티‘가 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신구간은 정월 하순쯤으로 보통 대한 닷새뒤부터 입춘 사흘전까지의 이레 동안인데, 자연히 분가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겨울에 혼인해서 신구간에 분가를 하게되니 부모와의 동거기간도 그만큼 짧아진다.

- 골고루 물려받는 재산

 제주의 재산상속은 대체로 ‘균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어느 때에 한꺼번에 모든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고 혼인해서 분가해 나갈 적마다 주기 때문에 형편에따라 장남이 좀더 많이 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막내가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식속에는 모든 자식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고 또 실제 사례를 보더라도 모든 아들에게 거의 비슷하게 상속하는 경우가 많다.

 조상제사를 올릴 비용을 대는 토지인 위토 곧 ‘제월전’ 또는 ‘소분전’은 상속재산과 별도로 제사를 물려받는 아들에게 준다. 그런데 육지와는 달리 반드시 장남만이 제사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고 여러 아들이 나누어 물려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장남이 제사를 물려받는 경우가 대체로 많기 때문에 장남의 상속분이 다른 아들보다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인 경우 상속은 아들에게만 되고 딸에게는 되지 않지만, 모든 아들에게 나누고도 여유가 있거나 물질(잠수일) 등을 통하여 재산형성에 기여한 바가 있는 경우 등에는 딸에게도 분재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때로는 딸뿐만이 아니라 아들과 손자들에게 별도로 물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별급이라고 한다. 넉넉하지 못한 경우에는 딸에게 주는 몫은 혼인시에 간단한 세간 등을 갖추어 주는 것으로 갈음한다. 때로는 다른 아들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등의 성장비용이 많이 소요된 경우에는 그 아들에게는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 수도 있다.

 제주만의 특징적인 점은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줄 적에 부모 자신들의 늘그막의 생활을 위하여 반드시 재산을 얼만큼 남겨두고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킨 뒤에 이 재산을 가지고 부부만의 독립된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고 부인만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력이 있을 때까지는 결코 아들의 부양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다가 너무 늙어 일 할 수가 없고 더는 독립생활을 꾸려 나갈 수가 없으면 이 재산을 아들에게 맡기고 부양을 받는다. 그런데 부부가 모두 죽으면 남긴 재산은 그들의 제사를 위한 제월전 또는 소분전이 된다. 이때 부양 또는 제사를 하는 아들이 장남에 한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 관례다.

- 제사는 반드시 소분전과 함께 물린다.

 장남의 분가를 허용하지 않는 육지부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제사를 치를 의무와 권리는 늘 아버지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장남도 분가하고 재산상속도 대체로 모든 아들에게 똑같이 하는 제주에서 조상의 제사를 맡는 문제는 그 가족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사를 지내야 할 조상이 많고 아버지가 아직 늙지 않은 경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제사를 나누어 지내는 수도 있다. 특히 제 친부모 제사는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활동시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지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제사를 물려줄 적에는 반드시 그 제사에 딸린 소분전도 함께 물려주어야 한다. 제사와 함께 소분전이 물려지기 때문에 제사경비도 소분전을 물려받은 아들이 부담한다. ‘내가 제사를 차린다.’고 할 때 ‘차린다’는 말은 제사경비를 부담함을 뜻한다.

 그런데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으면 사위나 외손자가 제사를 차리는 경우가 제주에서는 흔한 경우이다. 이것은 대체로 죽은 부부가 가까운 친척이 없거나 아주 가난하여 양자를 들이지 못하였던 경우에 생기는 일인데, 그 제사는 외손자의 당대까지만 지내게 된다.

 제주에서는, 혼인하고 죽은 사람만의 제사를 지내는 육지와 달리, 혼인을 하지 않아도 다 커서 죽으면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다만 외손 봉사나 미혼자 제사 등은 정식으로 모시는 제사가 아니라서 이웃이나 친척에게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지낸다. 이러한 제사를 ‘가마귀 모른 식개(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라 한다. 소분,제사 때문에 아들을 선호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본처가 아들이 없으면 첩을 두는 경우나 양자를 두게 되는 것이다.

 가계계승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혼’에서도 찿아볼 수 있다.사혼은 죽은 영혼끼리 혼인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아들이 커서 혼인을 하지 못하고 죽으면 사혼을 시켜서 양자를 들여서 가계의 끊김을 막고 제사를 이을 수 있게 한다.

- 합리적 생활 태도가 필요했던 까닭

 위에서 제주의 가족관계를 통해 제주인들의 성격을 볼 수 있었듯, 강한 독립생활 의지와 철저한 합리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실용성 같은 요소들이 제주사람들의 생활 밑바닥에 깔려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척박한 토질과 변화가 심한 기후를 이기고 살아남고 또 관리들의 수탈이나 왜적들의 노략질을 당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생활력과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육지 양반층의 유교문화가 쉽게 흘러들기도 힘들었겠으나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가 일찍이 전파되었다고 하더라도 실리와 능률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제주민들에게 넓게 뿌리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008.  10.  13.

                                                 제주지방법원  사법보좌관  고 태현